답이되는 기독교 - 팀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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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시대에 아직도 종교 타령인가.” “무식한 사람이나 예수 믿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말이 안 된다.” “기독교 신앙은 모자란 지성과 지나친 감상이 결합한 맹신일 뿐이다.” 오늘날은 경험적 이성을 중시하고, 인간 진보의 진화를 중시하며, 삶의 의미와 목적과 기쁨을 가장 자기답게 표현할 수 있는 만인의 선택권을 중시한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이나 절대자의 개념이 말이 될까? 이 시대에 신앙과 종교가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가?
회의론자 · 냉소주의자들의 성지 뉴욕 맨해튼에서
현대 세속주의를 경청하다, 함께 길을 찾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인생을
과연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
철저한 성경적 시각으로 현 세대를 예리하게 읽고 예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 팀 켈러가, 종교와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적인 이들과 세속적 관점을 지지하는 이들을 초대했다. 세속주의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지금 여기’에만 집중하며, 초월 세계나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세속주의에 한껏 젖어 산다. 이 책은 이 시대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맹종하는 세속주의에 말을 건다. 나아가, 세속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본질적인 요소들(삶의 의미, 만족, 자유, 정체성, 희망, 정의)에 대한 답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았다.
맹신과 불신의 벽을 넘어
마침내 “피조물의 한복판에 계신 창조주”께 이르다!
합리적이고 탄탄한 기독교적 답변들
마음을 정하지 못한 구도자와 회의론자들에게 이 책은 어느 때보다도 더 시의성 있는 기독교의 심오한 가치와 중요성을 밝히 드러내 준다.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하나님은 오늘 현재에 깊게 개입하시는 분이시며, 길을 잃은 세상 속 사람들을 온전케 하실 분이심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시공을 뛰어넘어 인류 역사의 그 어떤 사상보다 말이 되는 기독교,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진리가 여기 있다. 이제껏 딛고 휘청휘청 서 있던 허술한 인생 기초를 뒤흔들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인생을 세우라!
2023년 6월 28일 수요예배 설교 인용.
"어거스틴은 애착으로 변한 사랑의 치명적 해악을 확증한 후에 돌이켜 말하기를, 그런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면 선하고 옳으며, 또 그게 꼭 필요하다고 했다. 이 땅의 재화를 우상 삼아 집착하면 불필요한 고통과 비탄에 빠질 뿐이다. 해답은 삶의 이것저것을 덜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가정이나 일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에 비해 하나님을 너무 적게 사랑하는 데 있다. 강한 애착과 초연은 둘 다 해롭다. 완고한 마음으로 사랑을 몰아내지 말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렇다고 만족을 주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것에 마음을 최종적으로 내주지도 말라.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불어넣고, 당신 쪽에서도 그분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품으라. 그러면 변화가 찾아온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장수한다면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씩 땅에 묻히는 걸 보며 마음이 찢어질 것이다. 만족과 사랑의 최대 원천이 가정이라면, 그런 상황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면, 이제 위로와 희망과 기쁨과 가치의 최대 원천은 사별의 슬픔에도 끄떡없다. 오히려 슬픔 덕분에 그 원천에서 더 흡족히 마시게 된다. 당신은 공허하지 않으며, 상실로 인한 애끓는 아픔을 달래려고 늘 마음을 독하게 먹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당신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성경 말씀대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당신은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 산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강한 신자도 하나님을 완전하게 사랑하지는 못한다. 누구도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그러나 최대한 그분을 최고로 사랑하는 만큼, 모든 게 점차 질서를 되찾아 삶의 제자리로 돌아간다. 당신은 세상 것을 만족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로 누릴 수 있다. 예컨대 돈과 직업은 본연의 역할을 한다. 일은 당신의 재능을 활용해서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좋은 길이 되고, 돈은 가족을 부양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우리에게 안전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원천은 그런 것들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을 때 따라오는 값진 유익이 또 있다. 폴 블룸(Paul Bloom)이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How Pleasure Works, 살림출판사 역간)에 논했듯이, 쾌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순히 우리 오감에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소중한 타인과의 관계에 미치는 의미다. 세간에서 존경받는 화가의 원작인 줄로 알았던 그림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 쾌락은 반감된다. 편한 걸로만 치자면 다른 의자도 많겠지만, 어머니가 제일 좋아해 거실에 두고 즐겨 앉는 의자라면 그 의자는 다른 의자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준다. 신학적으로 표현해서 “대상을 (타인의 존재가 실린) 성례로 경험할 때 즐거움이 극대화된다.” 어떤 사람은 종교가 일상생활을 평가절하하고 “더 고상하고” 신령한 관심사만 떠받듦으로써 일상의 기쁨을 앗아 간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종교는 단연 기독교이거니와 적어도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용서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일부 타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세상을 버리고 등져야 그 공로로 복과 천국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대신 이루신 일을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창조주는 우리의 주권자만 아니라 또한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면 그때부터 세상을 더 “성례로” 경험할 수 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값없는 선물이요 장차 영원한 유산으로 받을 영광과 선의 예고편이다. 요컨대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애착을 두면 세상을 누리는 즐거움이 더 풍성하고 깊어진다.” 즐거움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무엇이든 더 적게 사랑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나머지 모두를 사랑하는 데서 오는 만족이 훨씬 커진다. 상대를 과보호할 일도 없고, 무리한 기대를 품을 일도 없고, 당신의 바람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늘 격분할 일도 없다. 무엇에 대해서든 열정적인 사랑을 억누를 게 아니라 최고의 사랑의 방향을 하나님 쪽으로 틀라.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되 무엇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분을 위해 사랑하라. 그래야만 비로소 만족이 찾아온다. 이것이 기독교적 관점의 만족이다. 이 관점은 초연해져서 평정을 얻는다는 고대의 전략과 무언가를 얻어 가짐으로써 행복을 얻는다는 현대의 전략, 이 두 가지 함정을 모두 비껴간다. 불치병처럼 보이는 우리의 불만족이라는 깊은 난제는 이것으로 설명되고, 해결된다."
p.100~101 (ebook 페이지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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